Chapter 2

'대한민국'의 주인이 둘로 나뉘다

DIRECTORS vs MANAGERS



어느 날, 善의 세력은 붕괴한 本邦의 현재 판도를 교묘히 뒤집어엎어 훗날 대규모 개입을 위한 초석으로 삼자며 결정을 내립니다.

당신은 그 담당자로 발탁되었습니다. 작전의 주요조건은 '스스로를 절대 노출하지 말라'였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머리가 좋지만 행동반경이 그리 크지 않은 DIRECTOR CLASS를 먼저 타격하는게 좋겠군요.

마치 그들이 말 안 듣는 기업을 굴복시키기 위해 해당 기업 중간간부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결성하여 공격하듯이 말입니다.


1962년 2차 공의회를 앞두고 꾸준히 바티칸과 제수이트의 컨트롤까지 되찾아온 '악마'들. 

그리고 그들의 하인으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 메이슨리.  (메이슨리에게 이렇게 말하면 욕먹을 겁니다 ㅋㅋ)


말단 하수인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자 인사권을 쥐고 있는 메이슨리는 그야말로 노조를 형성하기에 딱 좋은 계층입니다.

보통 좌익세력이 노조 좋아하는데 여기선 완전 반대군요... 하튼 저 놈들도 보고 있으면 변태들이란 말이죠.
볼수록 진짜 이상한 새끼들임.

이 판도를 만들어놓으면 '이이제이'는 물론이며, 노조는 善의 세력이 개입하는지도 모르고 반란에 집중을 할 것입니다. 


뭐 DIRECTOR CLASS는 '노조'가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누구의 것인지 정도야 눈치 챌 순 있겠지만 DIRECTORS만큼의 "지능"을 갖지 못하게 설계해 둔 '노조' 일원들에게 지금 그게 중요하겠습니까?



메이슨리를 비롯한 '노조'는 자기들보다 머리가 좋은, 이제는 적이 되어버린 제수이트를 상대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직속 부하들인 STAFFS를 가장 먼저 포섭해야만 합니다. 머리가 딸린다면 '머리수'로 밀어붙여야죠.


이런 비대칭적이면서도 밸런스 딱 좋은 내분 구도를 가지고 당신은 작전에 착수해야 할 겁니다.



당신은 조용히 지상으로 이동하여 관찰을 시작합니다. 어디서부터 허를 찔러야 할까요.








1961년 5월 16일


군부가 궐기, 서울에 무혈입성하며 장면 내각은 종말을 고합니다.


사실 방금 제가 써둔 그 한마디, 뭔가 이상합니다.


당시 배경을 '표면적으로만' 짚어볼까요?


・이승만은 Korean War 정전협정 체결 직후 사사오입 개헌(1954)을 단행합니다.

・이후 전국적인 '反독재운동'이 시민들을 주축으로 하여 발생합니다.

・그 후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하야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의 봄'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은 민주적인 내각체제로 흘러가던 상황이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이런 '서울의 봄'은 1년만에 군부 궐기에 의해 종료됩니다.

4.19혁명은 독재적인 이승만 정부를 향한 시민들의 운동 아니었습니까?


근데 왜 '독재'가 눈에 뻔히 보이는 군부 궐기를 두고 아무런 유혈사태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어째서 '쿠데타'의 형태로 집권한 군부는 5.16 직후 당시 제2공화국 내각보다는 제1공화국의 '이승만 정권'의 잔당들을 청소하는데 주력했던 걸까요?

누가 보면 당시 내각이 쿠데타 사주한 줄 알겠네요. ㅋㅋ 여러모로 앞뒤가 안 맞는 정황입니다.


먼저 이승만의 실각이 어떻게 이뤄졌길래 이게 가능했던건지를 봐야겠습니다.

제수이트의 야심찬 계획

5.16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각 정치인들이 서로 일부러 짜고치는 싸움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좌익세력의 분노는 진심으로 보입니다. 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좌익단체는 이승만을 여전히 미워하고 있군요.

심지어 극좌성향 밴드인 '밤섬'해적단의 가사에서도 이승만을 혐오하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구는 사망하기 직전 천주교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써 피아식별표를 남기고 사망했죠. 그의 가상 Profile은 '우익'이었으나 이런 피아식별표가 남겨졌으니 '좌익' 입장에선 영웅시할 만 합니다. )

뭐 이승만(Syngman Rhee)이 '이민족'의 수장인 것 쯤이야 여기 계신 분들도 다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만, 왜 좌익들은 이승만을 저렇게 싫어할까요?


분명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일이 아닌 게 느껴집니다. 

보통 좌익단체들은 천주교의 사업의 일환 아니었습니까?


더 살펴볼까요?

이승만이 하야한 직후 성립된 '장면 내각'을 봐야겠습니다.



대놓고 천주교 이력으로 점철된 "장면".

천주교 선교 사목 활동과 언론활동, 龍山 신학교, 1948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UN 총회에 수석대표로 파견되었네요.

더 있습니다. 무려 대통령 바티칸 특사를 거쳐선 제 1 대 주미 한국 대사를 지냈군요.

왜 바티칸에 갔어야 할까요? 동방의 작은 나라가 이제서야 막 '독립'했고, '레짐체인지' 가 되어가는 바티칸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나보네요.

1950년대에 복귀해버린 오리지널 DIRECTOR CLASS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ㅋㅋ


근데 이런 정치적 거물인 장면을 이승만은 살아 생전 무시해왔죠.


장면 무시한 이승만, 어떤 일까지 있었느냐면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14)-호외] 내각책임제 국무총리 장면 ②


" 이승만은 장면이 참의원 의장이 되는 것을 막고자 아예 참의원 선거를 실시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정·부통령이 취임하는 자리에서도 장면을 소개하지 않는 등 공식 석상에도 좌석을 마련치 않는 일도 일어났다. 이승만 대통령 아래 장면은 이름만 부통령이었지 늘 감시받는 인물이었다.  "


이미 당시부터 장면은 이승만의 잠재적 정적이 아니라 실존하는 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이 사이가 좋았다면 이승만이 굳이 장면을 향해 저런 결례까지 범할 필요가 없죠. 괜한 정적을 늘리는 셈이니까요.

이승만이 하야 한 후, 장면은 동년 8월 19일부터 제2공화국 내각체제의 정부수반으로서 취임합니다.

장면 입장에선 숨통이 좀 트였겠군요.


근데 이승만의 '계층'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 남산 주변에 위치한 메이슨리 집체장소 중 하나인 '서울클럽'을 살펴보면 이승만이 메이슨리, 그러니까 MANAGER CLASS 의 일원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Seoul Club History

" Among the group of people who first established the Seoul Club were many Freemasons, a large number of whom were gold miners by trade. "

" Steady improvements were made to the Club each year until the outbreak of the Korea War, when the Club was taken over by the U.S. Army, who for a time used it as a barracks and military club. In 1955, six Club members took informal possession of the premises, which was then in the custody of the Korean Army. Their right of occupancy was challenged. Fortunately, Harold Lady (then Personal Advisor to Syngman Rhee) ascertained that a record of the Emperor's intention that the site be used by foreigners in Seoul was filed in the Imperial Household records. "



대략 요약해보니 서울클럽은 메이슨리와 많은 금광업자들이 주축이 되어 건설되었네요.

Korean War 시기부터 미군에 의해 클럽이 점령되었지만 1955년에 6명의 클럽 회원들이 소유권을 이면적으로 가져오는데 성공하고, 'Emperor'가 외국인이 해당 건물을 사용해도 된다는 허가를 재확인하며 서울클럽은 다시 메이슨리의 그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이 Emperor의 허가를 재확인한 사람은 Harold Lady인데, 당시 이승만의 개인고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나저나 이 Emperor는 '대한제국의 고종' 느낌이 드는군요.
게다가 1955년이 되어서야 메이슨리가 자기들 건물을 되찾아오다니 뭔가 초라하네요. Korean War 시기야 미군이 대신해서 건물을 방어해준다는 명목이라도 있지, 전후에도 메이슨리에게 건물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부분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고보니 1953년에 취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메이슨'이 아니었죠.

서울클럽은 이를 두고 '소유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표현하고 있군요. 아이젠하워 시기부터 MANAGER CLASS 독점구조에 공격이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이 Harold Wendell Lady에 대한 정보는 Harold가 이승만에 보낸 편지 에서만 겨우 확인이 될 뿐, 실제로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삭제되었다고 봐야겠네요. 찾아봐도 안 나옵니다.

대충 Harold Lady가 메이슨리의 집체장소의 재확보를 위해 이승만의 힘을 동원했고, 그 힘으로 Emperor의 칙서를 발견해내는데 성공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군요.


게다가 얼굴도 안 까는 것을 보니 어쩌면 욕받이 이승만보다 실세였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메이슨리 내부에서는 부장과 과장의 사이 정도로 보면 되려나요?


뭐 Gooks에게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을 정도의 위치인데다가, 종전 후에 이들을 이끌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선 그 정도의 위치는 당연히 필요하겠죠.

아무래도 이승만이 MANAGER CLASS였겠다는 결론이 섭니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낸 1960년의 4.19는 결과적으로 따지면...

2차 공의회를 앞두고 바티칸을 장악한 오리지널 '악마'보스인 DIRECTOR CLASS의 MANAGER CLASS에 대한 보복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단순한 우연일까요?


당시의 배경, 1960년 4월.

4.19 혁명과 4.27 이승만 하야 외에 또 다른 이벤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제수이트가 직접 세웠던 西江大(시장대)의 개교가 있었습니다.



西江大 개교일 = 1960/4/18

'그 혁명'의 날짜 = 1960/4/19

이승만 하야일 = 1960/4/27


정리하자면, 제수이트의 반도 Branch가 개업하자마자 이승만의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 직후인 6월에 개헌을 진행하여 제2공화국이 시작,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장면이 그해 8월부터 내각의 수반을 장악하게 된 거네요.


그렇군요. 좌익이 미워하는 이승만. 알고보니 DIRECTOR 제수이트의 공격으로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승만이 장면을 무시했던 것은 4.19 이전에도 이승만계 이민족들과 천주교 제수이트 간의 알력싸움을 단편적으로 보여줬던 것이군요.

그렇다면 정황상 사사오입 개헌 (1954) 은 제수이트를 제대로 밀어내기 위해 이승만계열이 독단적으로 저질렀던 행위인 것이 맞는 것 같고요.

사사오입 개헌이 제수이트를 향한 이승만의 진심 펀치였다면, 필시 Korean War (1950~1953) 시기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 맞을테고, 이승만의 절친이자 미군 극동사령관인 맥아더가 1951년에 해임되었으니...

정전협정을 체결한 직후 이승만의 결심이 나타난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Korean War 시기 중 MANAGERS에게 DIRECTORS의 훼방이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1950년대, 이미 뇌가 교체된  제수이트는 당시 이승만을 '진심으로' 끌어내리려 한 게 맞겠다는 추론이 섭니다.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무혈로 정권을 장악했던 5.16 혁명.

 

그 직후 군부정권은 어떤 조치들을 취했을까요?


초창기의 박정희 정권에서는 꾹과 화교 계열 이민족들이 철저히 짓밟힙니다. 화교 자본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것도 이의 일환.
사진의 이정재는 가장 유명한 이승만계열의 인사였는데 엄청난 모멸감을 주며 시가행진을 하는군요.

아무리봐도 저항했던 MANAGERS에 대한 징벌적인 조치입니다.

그렇다면 5.16에 대한 바티칸의 반응은 또한 어땠을까요?


1960년대 명동대성당의 존재 이유


" 그러나 장면 정권은 5․16 쿠데타에 의해서 단명으로 끝나게 되자 민주당 정권을 적극 지지하던 당시 교회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주한교황사절단은 '반공을 기치로 삼은 정권'인 군사 쿠데타 당국에 대한 지지를 가장 먼저 표현하게 되었다. 그 후 서울교구 내지는 명동대성당에서는 쿠데타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전혀 시도한 바가 없었고, '반공'이라는 가치가 정당함을 내세워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



맞군요. 5.16은 '악마' 바티칸과 제수이트 주도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지들은 종교인사들이면서 정계를 인정을 하네 안하네 개소리를 하는군요 ㅋㅋㅋ 정교분리는 개뿔)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장면 내각은 분명 제수이트가 만든 '민주 내각'이었습니다.

가만히 두기만 해도 자기들 원하는대로 다 해쳐먹기 편한 구도인데, 왜 굳이 '군부'를 내세워 잔당 MANAGERS를 대대적으로 탄압해야 했을까요?

"민주적인 시민운동"까지 해놓고 왜 군부독재라는 테크트리를 탔어야 했을까요?


1961년 5월 16일.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제수이트는 전략을 뒤늦게 뒤집은 것으로 보이는 상황인데, 

그 사건이 무엇이었을까요?








JFK의 임기 시작일은 1961년 1월 20일. 그리고 5.16의 발생일은 1961년 5월 16일.

정황으로 따져보면 JFK의 당선 이후 DIRECTORS는 기존의 '민주 내각' 체제를 그대로 뒀다간 오히려 자신의 반대세력인 이승만과 해남계열, 非제수이트계 짱깨 화교들, 즉 MANAGER CLASS가 복수를 위해 의회를 접수하는 리스크를 예상했을 겁니다.


따라서 제수이트는 아예 군부를 내세워 독재정권 설립을 준비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그럼 제수이트였단 말인가? 그래서 남로당 이력이 있었던 걸까? "



그런 의문을 가지기 이전, 현대 시대로 다시 돌아와 보겠습니다.

위의 사진은 2018년의 자유한국당 당사 안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뒤의 벽엔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뉴욕 한복판에 Gooks 계열이 주도하여 게시했던 이미지

대한민국의 보수 정치권에선 왜 박정희 대통령과 이승만을 함께 영웅시하고 있을까요?

이승만이라는 MANAGER 그룹을 끌어내렸던 제수이트, 그리고 그 제수이트의 지원을 받아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 정권을 어떻게 동시에 영웅시화하고 있을까요?

정작 박정희 대통령께선 이승만이 귀국도 못하게 입국을 막았고 이승만이 사망했을 때 국장(國葬)도, 국민장(國民葬)도 아닌 그냥 가족장(家族葬)으로 격하하여 치르게 했습니다. 이건 정치적으로 큰 메시지입니다.


해남계 MANAGER들의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에 대한 취급을 그렇게 박하게했음에도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제수이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는 변명을 감안하더라도) 그들은 이승만과 같은 급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추앙하고 있는데 꽤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엔 제수이트의 지원을 받았건만, 오늘 날 좌익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정권 초기부터 시작되었던 '연좌제' 논란만 봐도 제수이트가 박정희 대통령을 혐오하는 것이 티가 납니다.


분명 박정희 대통령께서 집권하신 동안 어떤 균열음이 있었겠군요.



→ Chapte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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